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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일 교수님 기사[태홧강]읍내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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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00704030118041M.jpg 50년대 장생포 일대에 살던 사람들은 울산 시내에 가는 것을 '읍내 간다'라고 했다. 이웃집 아저씨나 아주머니가 옷을 곱게 차려 입고 나서는 것을 보고 다른 이웃 사람들이 어디에 가느냐고 물으면 읍내 장에 신발 사러 간다고 한다. 이때는 읍내 가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할 일 없는 아저씨들은 푼돈 몇 푼 호주머니에 넣고서는 국수나 막걸리를 사먹으러 읍내 장에까지 갔다 오기도 했다. 음식을 먹으러 가는 것보다 읍내 구경을 하고 싶어서이다. 구경이라야 별 것 없지만 그래도 읍내 장을 비롯해 옥교동, 성남동의 시가지를 기웃거리며 도시 냄새를 맡고 돌아올 때는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친구들에게 읍내에 갔다 온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그런데 장생포에서 울산 읍내까지 8km 비포장도로를 자동차편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걸어서 다녔다. 비포장도로라서 먼지가 많이 나서 읍내 한 번 갔다 오면 온 몸이 먼지투성이였다. 그래도 그때 사람들은 읍내 가는 것을 무슨 희망을 찾아 나서는 것으로 생각했다. 해방을 맞이했지만 찌든 가난과 곧이어 닥친 6.25 전쟁으로 세상살이가 막막한 때 읍내에서 멀리 떨어진 포구에서 살던 사람들로서는 세상 돌아가는 소식도 궁금하고 답답한 가슴을 식히기 위해서는 그래도 울산의 중심지인 읍내에 가면 무슨 소식이라든가 희망이 있을 것만 같았다. 또 울산 읍내가 있기에 무언가 든든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곳에는 제법 고전미가 나는 군청과 읍사무소 건물이 있었고 도심지에 향교가 있고 저 언덕 위에 높은 계단을 올라가면 울산 초등학교 건물이 우뚝 솟아 있었다. 그리고 옥교동 성남동의 번화가, 상업은행 네거리. 지금 생각하면 번화가도 아니지만 그 옛날 50년대는 울산의 번화가였다. 나는 읍내 가는 길을 초·중·고 시절 부지런하게 다녔다. 초등학교, 중학교 때는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이 시작되면 북정동에 있는 외가에서 지내기 위해 읍내에 갔다. 그리고 고교 시절에는 대부분을 외가에서 다녔기 때문에 주말이면 장생포 집에 왔다가 월요일에 다시 읍내로 갔다. 장생포에서 읍내로 가는 차량이 하루에 서너 번 있었으나 차비가 아까워 대부분 사람들은 걸어서 다녔다. 외가에서 지내다가 주말에 집에 와서 하루를 쉬고 일요일 오후에 다시 읍내 외가에 가려고 하면 어머니는 외할머니에게 갖다 드리라고 삶은 고래고기 꾸러미를 손에 쥐어준다. 나는 그 꾸러미를 들고 20리 신작로 길을 걷기 시작한다. 여천동을 지나면 곧바로 여천고개다. 고개에 올라서면 울산 읍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여천고개만 넘으면 읍내 가는 길은 평탄한 신작로 길이다. 삼산평야를 지나 태화강을 건너 읍내로 들어서면 그렇게 아늑할 수가 없다. 우리 외가집은 북정동에서도 제일 끝자락 허촌각단에 있었다. 외가집이 있는 북정동 허촌각단에서 외숙모의 고향과 외할머니의 고향인 성안동과 가대동에도 부지런히 놀러 다니면서 함월산의 푸르름을 마음껏 누렸다. 읍내 가는 길이 처음 개설된 것은 1918년으로 장생포와 울산 그리고 급행열차가 정차하는 물금역까지 하루 1일 1회 8인승 1대의 차량이 왕복 운행하였다. 읍내 가는 길은 나에게는 장생포가 시발점이라면 외가집이 종착역이었고 그 너머 종착역을 감싸고 있는 함월산은 나의 영원한 이상향이었다. 타향에서 괴로울 때나 슬플 때 또 즐거울 때 가만히 눈 감으면 읍내 가는 길이 주마등처럼 펼쳐진다. 읍내 가는 길은 나의 영원한 희망의 길이며 정신적 원천이었다. 김삼일 대경대 교수·경산 (그 옛날 울산토박이들은 태화강을 '태홧강'이라고 발음합니다. 맑고 아름다웠던 그 '태홧강'은 울산사람들에게 마음의 고향입니다. 칼럼 '태홧강'은 울산을 떠나 다른 도시에 살면서도 가슴 한켠에 울산을 품고 사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습니다.)